실체도 없는 '연금 사회주의' 때문에 의결권 제한? 투기펀드 공격때는 어쩔건가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누가 들으면 국민연금이 이번 주총시즌에서 백전백승을 한 줄 알판이다.

그러나 현실은 1승9패일뿐이고, 그 1승 또한 사실은 ‘의문의 1승’이다. 9패는 아홉 번 졌다기보다 이회사저회사에서 이것저것 내는 안건마다 모두 부결됐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의문의 1승’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 부결이다. ‘의문’을 붙인 이유는 다른 회사 같았으면 이 또한 국민연금이 패해서 주총 전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대한항공의 이사선임 조건이 주주찬성 50%였다면 64.1% 찬성을 받은 조양호 회장의 이사연임은 당초부터 걱정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회사는 굳이 이사선임을 특별결의 사항으로 규정했다.

업계에서는 사측과 입장이 다른 이사 선임을 막기 위한 예방책을 만든 것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결과는 조 회장 연임을 막는 자충수가 됐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즌 1승을 챙겼다.

재계 일각에서는 국민연금 때문에 조 회장 연임이 실패했다는 불만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프로야구에서 패배한 팀이 “투수가 완봉을 못한 때문”이라고 희생양을 찾는 거나 마찬가지다.

또한, 1997년 한보그룹 부도 때 정태수 한보회장이 “산업은행이 3000억 원 대출 안 해줘서 부도났다”고 핑계 댄 것과도 흡사하다.

자기가 초래한 근본원인은 생각 않고, 무고한 제3자의 미봉책만 기대하는 사람들의 상투적인 말투다.

어떻든 국민연금과 회사 측의 의견이 엇갈려 총수가 이사에서 물러나는 일이 사상처음으로 발생하자 이게 말 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본능을 잔뜩 자극하게 됐다. ‘연금사회주의’라는 말이 또다시 도처에서 나오고 있다.

더 나아가, 자유한국당에서는 국민연금이 아무리 지분을 많이 갖고 있어도 의결권을 5% 이내로 제한하겠다고 나섰다.

이 당은 지금도 간간이 한국 기업의 경영권을 외국자본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런 정당에서 정작 가장 큰 손 국적자본의 힘을 빼내겠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만약 2003년 SK그룹에 대한 소버린의 경영권 공격과 같은 일이 또 다시 벌어졌을 때, 이런 주장이 법으로 존재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 사진=뉴시스.


‘연금사회주의’란 말을 요즘 많이 한다. 이 말의 원형인 ‘연기금사회주의’는 2004년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유승민 바른미래당 국회의원이 국정감사에서 강조한 것이다.

이 때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허용하도록 법을 만든 데 대해 그가 반대의 논거로 사용한 단어다. 그는 이때도 야당의원이었다.

야당이란 아무리 좋은 정책도 견제를 해야 하는 본분이 있어서, 당시의 반대는 1970년대 야당의 경부고속도로 반대와 같은 충정으로 해석하기에 충분한 일이다.

연기금의 주식투자가 허용되면서 주식시장 기반이 확대됐고, 기업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자는 운동도 이때부터 본격화돼 한국주식시장의 신인도가 높아졌다. 한국시장은 투자할 곳이 못된다고 여기던 외국의 장기자본들이 한국 기업의 주식을 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수 십 년 동안 500 안팎을 못 벗어나던 주가가 몇 달 만에 2000에 도달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반세기만에 주가지수 2000 시대를 연 양대 공신은 연기금 주식투자와 지배구조 개선이다.

국민연금 의결권 5% 제한 주장에는 연기금의 주식투자와 기업지배구조 개선 두 가지 모두에 대해 여전히 적대적인 감정이 엿보인다. 1981~1997년 내내 집권하는 동안 주가지수가 잠시 1000에 도달하면 곧바로 300으로 추락하는 과정만 반복했던 정당이 주가 2000 도달의 양대 공신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렇게 불편한 게 많다.

국민연금에 대해 금융시장에서는 자기들이 ‘큰 손’이라고 ‘갑질’을 한다는 불평도 있고, 과연 수익을 제대로 내는지 국민들은 여전히 불안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럴수록, 국민연금이 수익률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기업을 고르도록 힘을 실어줘야지, 오히려 반대로 힘을 빼내는 것이 과연 무슨 의도에서 나온 것인가.

만약 국민연금이 막대한 투자를 하고도 의결권이 묶여서 오히려 기업의 경영권이 엉뚱한 데로 넘어가는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그때 쏟아지게 될 원망을 어쩔건가.

이번 주주총회의 본질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직원들에게 폭언·폭행을 일삼던 총수 일가가 이사 자리 하나를 내준 것뿐이다. 경영권에는 사실상 아무 태풍도 없었다. 이것은 대한항공보다 이틀 후 열린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입증됐다.

이런 마당에 정치권의 ‘연금사회주의’ 호들갑이 오히려 주식시장의 투자근간을 뒤흔들 수 있다.

차제에 국민연금 또한 여전히 부실한 역량에 불필요한 적대심을 유발하는 공격행위는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식시장 큰손이라는데 ‘1승9패’ 시즌 전적은 좀 보기가 안됐다. 이기지도 못할 제안을 남발하면, 연금의 주인인 국민은 “이 사람들이 딴 데 정신이 팔렸나”라는 걱정을 하게 된다.

만약 주총의 승패여부를 떠나 무조건 “이게 옳다”라는 자기만의 신념을 앞세우려 한다면, 그 사람은 국민연금보다는 소액주주 운동을 위한 시민단체로 일자리를 옮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의미 있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