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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위기, 원인은 무엇이었나 (3)] 1996년은 마지막 기회였다
[IMF 위기, 원인은 무엇이었나 (3)] 1996년은 마지막 기회였다
  • 장경순 기자
  • 승인 2019.01.06 17: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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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금사 난립, 무리한 외환시장 개입, 사상최대 경상수지 적자의 한 해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59] 무엇이 IMF 위기를 초래했나 (3)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는 말 그대로 1997년의 위기다. 그러나 사태의 핵심적인 진행은 1996년에 이뤄졌다고 나는 판단한다. 바꿔 말하면, 1996년이 IMF 위기를 막을 수 있던 마지막 기회였다고 본다.

내가 ‘실패한 보초병’으로서 반성문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소한 이 때 가을까지 만이라도 나의 일일보고서에 경보를 담았더라면, 오늘날 나만큼은 남달리 역할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보고서에 경보를 냈다면 위기를 조금이라도 막았을 것이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국정을 보살피는 분들이 일개 행원이 쓰는 보고서까지 다 읽을 만큼 한가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설령 봤다하더라도 1990년대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반응은 은행원이 이상한 소리나 쓰니 담당부장이 주의 좀 주시라는 정도였을 것이다.

관련시리즈: [38회] 한국사에서 상대적으로 주목 못 받는 1996년
 

▲ 김영삼 대통령이 1996년 제주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 앞선 1995년에 소득 1만달러를 달성하고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한국은 이제 선진국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오히려 뭔가가 잘 안풀린다는 분위기만 짙어졌다. 다음해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게 됐다. /사진=뉴시스.


3. 경직된 원화가치 방어. 시장개입

연초부터 800, 820원이 차례로 무너질 때마다 무수히 외환보유액을 동원한 환율공방이 벌어졌다. 모든 경제요인으로 볼 때, 원화가치 절하는 너무나 당연했지만 아무도 이걸 지적하지 못했다. 내가 실패한 보초병으로 자처하는 이유다.

1998년 이후 위기의 급속한 탈출 가운데 큰 이유가 원화가치 절하, 즉 원화환율의 급상승이란 점에서 1996년의 무리한 환율 억제는 명백한 IMF 위기 원인이다.

그러나 원화환율 상승을 용인한다는 건, 이 때 사상 처음으로 이룩한 국민소득 1만 달러에서 후퇴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 집권세력이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시점에서 이런 충정 가득하지만, 들끓는 비난을 자초할 수 밖에 없는 결정을 내릴만한 사람들은 아니었다고 본다.

관련시리즈: [21회] [24회] [25회] [34회]
 

4. 종금사 난립. IMF 위기의 시작

미국의 국제투자자금 흡수와 같은 외부요인이 있어서 IMF 위기가 왔다면, 한국뿐만 아니라 대만, 싱가포르 등 당시 한국과 경쟁하던 아시아 4룡이 모두 똑같은 위기를 겪었어야 한다. 4룡 가운데 한국만이 위기를 겪었다면 한국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종금사 난립이다.

투자금융회사와 달리 외환영업을 할 수 있는 종금사는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전까지 6개였다. 그러나 1996년에 30개로 폭증해 있었다.

이들은 그러나 외화를 조달할만한 국제 신용등급도 갖지 못했고, 인맥 학맥을 동원해 은행에게 조달시켜 가져온 외화를 안전하게 운용할 능력도 갖지 못했다. 1주일짜리 미국 돈을 빌려 회수가 의문스러운 개발도상국에 3개월 단위로 투자했다가 국난을 자초했다.

무더기 종금사 허용을 누가 했는지 책임진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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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체력을 급격히 저하시킨 사상최대 무역적자

구조조정이란 단어는 외환위기 이전, 잘 나가던 1995년에도 간간이 등장했다. 그러나 반도체 호황에 따른 수출증가가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구조조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1996년 들어 반도체 시장이 급격히 위축됐다. 이해 경상수지가 238억3000만 달러의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했다.

환율을 급등시킨 것은 경상수지적자만은 아니다. 그러나 서울 외환시장에 달러 공급을 급격히 축소시킨 건 전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다.

관련시리즈: [22회]
 

1996년이 1997년과 가장 크게 다른 것은 집권세력의 드높은 자부심이다. ‘경제펀드멘털’에는 아무 문제없다고 큰소리쳤다. 이들은 국민소득 1만 달러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달성한 자신들을 비판할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믿었다. 정치력에 대한 자부심도 드높았다.

그러나 이들은 연말의 노동법 파동으로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했다. 해가 바뀌면 한보와 기아사태로 경제에 대한 자신감도 잃고 만다.

차라리 이들이 한해 더 빨리 자신감을 잃어서 치솟아야 할 환율을 억지로 막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1996년이 던지는 의문이다.

‘IMF 위기’를 가져온 요인은 지금까지 언급한 5가지뿐만 아니다. 다음 글로 이어진다.


[IMF 위기, 원인은 무엇이었나 (4)] 연준의 연속적 금리인상과 국제 투자자금 역류

[58회] 1996년 노동법파동, 이미 IMF 위기와 무관한 딴전부리기였다

[57회] [IMF 위기, 원인은 무엇이었나 (1)] 1997년 봄에 벌어진 일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첫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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